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 Page 78

제 4 부 엑셀승용차와 머세데스 벤츠 그 날 그 이후 - 로스앤젤레스 폭동 10 주년에 즈음하여 - 그 날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가슴을 조이고 있으면서도 선뜻 나서지를 못했었다. 그 상황에서 설령 뛰쳐나갈 수 있었다 한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가 있었을까 도 생각해 본다. 마음속으로는 불의 같은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듯하면서도 막상 벌어지고 있는 상황 앞에 나서지 도 못하는 주제에 나 같은 게 무엇을 어떻게 할 수가 있었을까. 폭도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는 우리의 동포 이웃들, 몸부림치며 “왜 하필이면 우리에게......”, “우리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라며 울부짖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은 처절하기만 했다. 유리창이나 진열장을 부수고 가전제품이며, 가구나 옷가지 또는 식품 류 등을 닥치는 대로 끌어내어 자기네 트럭에 실어 나르는 모습들도 보인다. 트럭에 싣고 나서는 마무리 작업을 하기라도 하는 듯 깨어진 유리창 안으로 화염병을 던져 불을 지르기도 한다. TV 화면에는 폭도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정당하고 마치 어떤 투쟁에서의 승리를 거둔 투사이기나 한 것처럼 저들끼리 ‘하이 화이브’를 나누거나 높이 치켜든 손으로는 승리의 'V' 자를 그리는 모습이 비치기도 한다. 체념을 한 듯 넋 놓고 서서 그들의 만행을 바라다보고만 있는 업주들. 마치 벼랑의 끝에 서서 운명에만 맡기고 있는 듯한 모습들이다. 무리들이 휩쓸고 지나간 후의 썰렁해진 텃밭. 땀과 눈물 그리고 숯검정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순식간에 박살이 나 흩어진 꿈의 부스러기들을 건져보려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우리 이웃의 모습이 애처롭다. 그들이 겪고 있는 아픔 앞에 작은 손길 하나 내밀어 보지도 못했던 내가 이제 와서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말 할 수가 있을까. 어쩌면 나는 그 당시 폭동의 현장에서 거리가 먼 곳에 살고 있어 나와는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는 강 건너의 불빛 정도로 여기고 있지는 않았을까. 어쩌면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가 아니라는 데에 대한 안도와 이러한 피해를 받지 않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미치게 되니 이십 년도 훨씬 지난 이 시간에도 얼굴이 뜨거워진다. 목숨을 담보로 걸고 한 팩의 콜라 병이라도 건지기 위해 불길 속에 뛰어들고 있는 업주들. 두려움 없이 앞장서고 있는 청소년 자원봉사들, 그리고 아무 연고도 없는 동포 이웃을 돕겠다고 나섰다가 총탄에 쓰러진 이재성 이라는 젊은이. 이들이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 뭉쳐지고 있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타운 내에서 사후 대책의 일환으로 돕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을 때 모금함에 몇 푼의 달러를 집어넣는 일이나 피해자들의 보상청구를 위한 몇 장의 서류작성을 돕는 것만으로는 나의 이러한 부끄러움들이 감추어 질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세계 일등 국가요 민주주의의 표본이라고 믿어 왔던 이곳 미국. 착실하고 성실하며 근면과 끈기만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산의 전부로 삼아왔던 우리들. 이러한 우리 식 삶의 자세로만 임해 나간다면 자기가 설 수 있는 최소한의 텃밭은 일구어 나갈 수가 있을 것으로만 믿어 오기도 했었다. 그러기에 이곳을 ‘기회의 땅’으로 여겨왔고, 그러기에 그들은 땀을 흘려왔다. 오늘 하루를 썩혀 내일이라는 싹을 틔우기 위해 시간과 착실한 노력의 투자만으로 밤낮 없이 뛰어온 그들이기도 하다. 천사의 도시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곳 로스앤젤레스의 시내 한복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 앞에 멍하니 바라다만 보고 있어야만 했던 4.29 그 날. 이러한 상황에서 한마디의 말도 못하며 항상 우선순위의 뒷켠에서 서성거리고만 있어야 하는 이민자에게 “주인의식” 운운한다는 것은 일종의 가식일지도 모른다. 소수민족으로서의 외로움과 서러움 같은 것을 곱씹으며 생존을 위한 자기 자신과의 투쟁을 해 나가야만 했던 우리, 내일을 위해 오늘을 피와 땀으로 다져 나가야만 했던 우리들이 아니었던가. 법치주의 국가에서 터무니없이 당하고만 있으면서도 치안의 부재 속에서 속수무책인 채 우리가 오직 할 수가 있었던 일이라면 뒤쪽에 서서 절망과 설움 속에 울부짖는 일 말고는 다른 무슨 대책이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