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 Page 53

있다. 그런데 이 여자아이 하나의 기호나 필요를 위해 이제까지 이어온 생활 리듬을 깨트려버릴 수도 없는 입장이니 답답한 노릇이다. 인터넷은 필수라고 하여 학교생활이나 학업에 필요한 자료나 정보를 위해 사용하려는 줄로만 알았다. 서둘러 고속라인(DSL)에 네트워크 시스템을 설치해 주었더니 채팅인가 무엇인가를 하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다. 그럴싸하게 알리바이까지 엮어가며 해대는 거짓말도 수준급이다. 있지도 않은 교회나 학교에서의 행사를 핑계로 걸핏하면 밖에 나가려 한다. 친구의 생일이라고 나가서 자고 오기도 한다. 차를 태우고 다니다가 컨버터블 수입 스포츠카가 지나가면 “아, 저 차,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이라며 소리치기도 하더니 요새는 BMW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남자학생과 어울려 다니는 일이 잦아졌다. 인근의 초급대학에 유학을 온 아이라고 한다. 주니어 칼리지에 유학을 보내놓고 외제 고급 승용차를 사주는 한국의 부모님 사랑도 대단한 것 같다. ‘펀드 레이싱을 위한 세차(洗車)를 하러 나간다’거나 ‘노숙자 봉사 활동’ 등의 구실을 붙여 나가기 일쑤이고 떠날 때 보면 그 유학생의 BMW 에 오르는 것이 목격된 것도 여러 차례다. 한번 나갔다 하면 밤 열 시가 넘어야 돌아오는 게 상례이다. 우리 아이들이 대학에 다닐 때 한국학생들의 모임인 ‘코리안 클럽’에도 참여 할 것을 강력히 권한 적이 있다. 정서가 같은 한국인끼리 친구도 사귀며 한국말도 배울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한 두 차례 참석 해보더니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혹시나 한국인을 기피하는 무슨 이유라도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채근하듯 다그치니 “관심도 흥미도 없다”는 것이었다. 더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했다. 설명인즉, 우선 “흥미를 끌만한 대화나 활동이 없다”는 것이었다. 대화의 내용들 중엔 “누구는 무슨 차를 타고, 입고 있는 옷의 브랜드며 어디에서 샀으며 얼마를 주었다”는 등의 이야기로부터 자기네 부모들이 어떤 위치에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다는 둥 “누구는 무엇이 어떻고” 라는 식의 제삼자에 대한 이야기들만 늘어놓고 있다는 것이다. 좋은 이야기보다는 흉을 보고 헐뜯는 이야기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재미도 없고 지루한 자리에 찾아가 무엇을 하라는 것이냐는 것이었다. 짐작이 가는 이야기였다. 트리프티 스토어(Thrifty Store) 같은 중고품 점에 가서 입을 만 하다고 생각되면 일-이 달러짜리 중고 옷을 사 입기도 하는 이 아이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생각해 본다. 그 후부터는 코리언 클럽에 참가하는 것을 권하지도 말리지도 못했던 일이 생각난다. 이제 이 아이의 어리광이나 재롱이 귀엽게만 느껴지지가 않는다. 애 늙은이 같기도 하고 약간은 무섭기도 하다. 내 아이 같으면 때로는 야단도 칠 수도 있겠지만 내가 그 아이의 부모와 똑같은 행동을 할 수도 없다. 이대로 나가면 안 될 것 같아 한국에 있는 이 아이의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조심스럽게 상의를 해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염려에 대하여 오히려 불쾌한 듯 한 반응이 오는 것이었다. 마치 ‘사랑스럽고 예쁘기만 한 우리아이가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당신들이 참견할 게 뭐냐’는 듯 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우리가 더 이상의 간여를 할 사항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따금 아내의 입을 통해 충고의 이야기를 해주기도 한다. 내 자식이 아니지만 이대로 나가면 안 될 것 같아서이다. 어린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나 자기 나름대로의 어려움도 많을 것 같아 측은하게 느껴질 때도 없지가 않다. 하지만 우리의 이러한 작은 우려가 이 아이에게 제대로 받아들여졌으면 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조기 유학의 당초 목표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깨닫고 이에 걸맞은 생활태도를 지켜 나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간이라도 빼어주고 싶고 보듬어 주고 싶은 모습으로 되돌릴 수는 없을까. 이를 위해 우리가 그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슨 방법은 없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