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 Page 16

건 망 증 이러다가는 항상 노트와 연필을 지니고 다녀야 할 것만 같다. 눈을 뜨고 하루가 시작되는 그 시각부터 그날그날의 해야 할 일이라든지 기억해 두어야 할 중요한 일들을 일일이 기록을 해 놓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그렇지 않고는 지금의 내 기억력으로는 꼭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해 낼 자신이 없으니 말이다. 몇 달 전도 아니고 며칠 전도 아닌 불과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들을 까맣게 잊게 되는 일이 허다한 게 요즈음의 내 모습이다. 있다. 심지어는 몇 분 후에 해야 할 계획 같은 것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다가 일을 망치게 되는 경우도 이런 일들이 날로 늘어만 가고 있으니 문제가 아닐 수가 없다. 나에게는 전화들이다. 새벽 한시나 두세 시에도 걸려오는 전화가 많다. 비즈니스에 관련된 해외에서 오는 이런 경우 잠결에라도 정확한 메시지를 받아두어야 하기 때문에 침대 곁 테이블에는 항상 메모지와 연필을 준비해 놓고 있다. 것은 아니다. 자동차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나의 희미한 기억력을 되살리기에 충분한 기록해 놓은 이 메모쪽지를 찾는 일이 또 문제가 되고 있으니 말이다. 사무실로 가지고 나온 것이 분명한데도 찾을 길이 없는 것이다. 아침에 그 메모지를 아내는 “적어놓으면 뭣해. 그 쪽지를 찾지도 못할 걸”이라며 해해거린다. 돌이켜 보면 나의 기억력이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 글자 하나 틀리지 않게 외우고 있다. 초등학교 때 국어교과서에 나와 있는 시를 적어놓지도 않았지만 이삼십 여 년 전에 사용했던 전화번호며 친구 딸의 생일 같은 것을 지금까지 기억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그리 나쁘지 않은 기억력이다. 한번 초대된 일이 있었다. 삼십여 년 전의 일이다. 정도가 아니라 알아줄 만한 기억력이 아닌가. 듣는다. 그 아이의 첫돌에 그 날짜를 지금까지 기억을 하고 있는 걸 보면 나쁘지 않은 요즈음 아내로부터 “정신을 어디에 두고 다니느냐”는 말을 자주 그럴 때마다 나는 이 아이의 생일을 떠 올려 보곤 한다. 나의 기억력을 재확인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기억을 하고 있다는 그 아이의 생일이 과연 맞는 것인지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내 자신이 미더워 지지가 않는다는 뜻일 게다. 그 친구에게 전화를 해봤다. 이 친구와 마지막 연락을 한 것이 아마 삼사 년은 족히 된 것 같다. 문안 차 연락을 했다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친구 딸의 생일이 몇 월 며칠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며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 자신도 자기 딸의 생일이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아서인지 잠시 머뭇거리다가 “애들 중의 하나가 바로 그 날인 것 같다”며 얼버무린다. 정도를 확인하기 위한 연락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것도 같다. 사실 오랜만의 안부도 듣고 싶었지만 내 기억력의 나의 기억이 정확했다는 것이 확인되고 나니 다소 위안이 되는 하기야 치매환자도 오래 전에 있었던 기억은 생생하다고 하는데 나도 이러한 증상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나는 십여 년째 집에서 일을 하는 소위 재택(在宅) 근무를 해 오고 있다. 이곳 로스앤젤레스의 시간보다 세 시간이 빠른 동부 지역 거래처와의 업무연락을 하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연락을 하다 보면 아침식사는 하는 둥 마는 둥 적당히 넘기게 된다. 대개 낮 한 시쯤에 점심을 겸하여 식사를 하게 된다. 고등학교 때 친구가 찾아와 함께 나가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열두 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열한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집에 들어와 얼마간 일을 하다 보니 한시가 되었다. 생각 없이 식사를 거뜬히 해 치웠다. 하루는 가까이 지내고 있는 그와 헤어진 것은 평소에 해 오던 것처럼 아무 그 친구와 헤어진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한 시간 동안에 두 번의 점심식사를 하게 된 셈이다. 나의 이 건망증. 식사를 했는지 않았는지에 대한 기억을 할 수 없었다는 정도는 봐줄 수도 있겠다. 나의 건망증은 배가 고픈지 부른지에 대한 분간마저도 무디게 하고 있었나 보다. 한 톨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느껴졌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식당에서도 일인 분의 식사를 밥 집에 와서도 평소의 분량대로 먹을 때 하다못해 배가 부르다는 것이라도 이는 단순한 건망증이 아니고 부분적인 기억 상실 증이라고 해야 하는 게 옳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