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 Page 145

캘라한씨 부부 뒤늦게나마 캘라한씨 부부의 명복을 빈다. 이분들과의 만남에 대해서는 흔히들 말하는 인덕이나 인복 또는 행운이라는 말만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될 수가 없다. 구태여 말로서 표현을 해야 한다면 하나님의 이끄심에 의한 축복이었다고나 할까, 우리에게는 구세주와 같은 분들이었다. 테네시 주의 조그만 도시 컬럼비아에 도착한 것은 1975 년 구월이었다. 아내의 친구가 소개한 원 베드룸의 조그만 아파트에서 이민 가방은 풀어놨으나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길은 막막하였다. 새로 시작되는 미국생활에의 길잡이로 기대했던 그녀는 우리가 도착을 하자마자 테네시 주의 수도인 내쉬빌로 떠나고 말았다. 무인도에 표류된 로빈슨 크루소가 돼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로스앤젤레스나 뉴욕 같은 데는 많은 한국인들이 살고 있어 한인 타운이 형성돼 있기도 했지만 그 곳 에는 한국인은 고사하고 동양인이라고는 이제 막 도착한 우리 가족 세 명이 전부였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시작되었지만 우리에게 길잡이가 돼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직장을 구하는 일로부터 살다 보면 생기기 마련인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을 스스로 알아서 처리 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곳에 도착된 후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아파트의 매니저로부터 전갈이 왔다. 그 동안 여러 곳을 걸어 다니며 구직 신청서를 써 놓았던 한 업소에서 인터뷰를 하자는 연락이 와 있었다. 고급 백화점으로 미 동남부의 주요 도시에 수십 개의 체인점이 있는 팍스 벨크사에서였다. 마침내 이 회사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얼마 후부터는 아내도 그곳의 카운티 병원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 병원은 걸어서 십분 미만의 거리에 있었고 나는 직장의 매니저가 자기의 차로 출퇴근을 시켜 주었다. 이 정도면 제법 성공적인 미국생활의 시작을 하게 되었다며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 겨우 한 살 반 밖에 되지 않은 큰아이 완이(Wannie)가 문제였다. 급한 대로 아파트 단지에 있는 한 백인 여대생이 아이를 봐주기로 하여 한시름 놓기는 했으나 마음은 놓이지 않았다. 나이 어린 여학생이 이제 겨우 걸음마를 배워 뒤뚱거리고 말도 할 줄 모르는 아이를 제대로 돌봐 줄 수가 있을지 가 염려되어서였다. 일을 하다가도 넋을 놓고 멍청히 서 있을 때가 많았는데 아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완이에게는 미안한 마음 가득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여기며 감수를 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추수감사절이 가까워 올 때 그곳의 일간지 기자로부터 인터뷰 요청이 왔다. 추수감사절 아침신문에 특집 기사로 한국인 가족인 우리를 소개하겠다는 것이다. 아침 신문의 일면에는 커다란 가족사진과 함께 ‘한국인 가족 컬럼비아에 정착’이라는 제목으로 우리 가족이 소개된 기사가 실려 나왔다. 이 신문 기사는 우리를 일약 이곳의 유명인사(?)로 만들어 놓게 되었다. 거리에 나가면 “당신이 추수감사절 모닝페이퍼에 나온 미스터 박이 아니냐”고 말을 걸어오는 사람도 많았다. 여러 단체나 개인들로부터도 연락이 오고 선물 꾸러미를 들고 방문해 오기도 했었다. 업체들로부터는 무료 저녁 식사 권이나 미용실 이용권, 호텔 투숙 권, 세탁소 이용권 등 각종 상품권이나 선물 보따리를 보내오기도 했다. 아무런 신용기록도 없는 우리에게 가구나 가전제품 같은 것을 이자도 없이 장기 할부로 주기도 하며 오래 진열돼있던 물건은 무료로 주기도 했었다. ‘이곳이 바로 미국이라는 나라였구나’라는 생각을 해보며 앞으로 많은 어려움도 따르겠지만 우리의 미국 행 이민이 결코 잘못된 결정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이 신문 기사는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쟌과 매어리 캘라한씨 부부와의 만남이었다. 신문 기사를 읽고 찾아 왔다는 이분들은 우리가 미국에서의 생활을 어려움 없이, 그리고 복되게 시작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신 분들이다. 우리가 일을 해야 하는 낮 시간 동안에 큰아이 완이를 돌보아 주겠다는 것이다. 완이의 식사도 알아서 해 주겠으니 아무런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일에만 열중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 칠순이 넘은 그분들은 그 외에도 우리를 위해 수시로 옥수수 빵과 베이컨을 섞어 만든 머스터드 그린 또는 펌킨 파이 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