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 Page 126

콩나물 팝니다 한국 전쟁이 멈춘 1950 년대 초 내가 초등학교 4-5 학년 때의 일로 기억된다. 아버지가 그곳의 지방법원으로 전근되어 내가 그곳으로 전학을 한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을 무렵이다. 어머니는 공무원인 아버지의 박봉으로 8 남매의 치다꺼리와 힘겨운 가사를 이어가는데 작으나마 일조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며 한복의 삯바느질과 콩나물 기르기를 시작하셨다. 여기서 들어오는 수입 이래야 보잘것없는 푼돈에 불과 했지만 우리들의 학비 일부와 식탁의 빈자리 일부라도 채울 수는 있었다. 평상시의 밥상에는 푸성귀 한두 가지가 고작인 우리 집 수준을 감안 한다면 이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몫을 담당했다고나 할까. 아버지는 역정을 내셨다. 판사의 부인 이라는 사람이 몇 푼의 돈을 벌겠다고 이런 짓을 하고 있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해서였을까. 이웃이나 법원의 직원들에게 까지 알려지는 것을 우려하셨을 지도 모른다. 당장 집어 치우라며 역정은 부리면서도 딱 부러지게 극구 말리지도 못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대쪽 같은 성격의 청백리 이면서도 자부심도 강한 법관의 아내가 삯바느질을 하고 콩나물을 길러 판다는 것에 대하여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땔감으로 쓸 마른 갈대 줄기를 걷어 오기 위하여 이십 여리나 되는 내장산 아래의 강가를 오가시던 어머니. 위험을 무릅쓰고 후퇴 하다 낙오된 공비 잔당들이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고 불발된 폭탄이 즐비한 그곳을 다니셨다. 이제는 삯바느질에 콩나물을 길러 팔고 있는 것에 대하여 겉으로는 화를 내면서도 못 이기는 듯 바라만 보고 계시던 아버지의 속내를 읽어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가장으로서 많은 식구들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 같은 것도 느끼셨으리라. 당신의 쥐꼬리만 한 월급만으로 많은 식구들의 부양은 물론 가끔 친척들이나 한때 알고 지내던 이웃 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찾아와 손을 내미는 고향 사람들을 뿌리치지 못하던 아버지이셨다. 이런 상황에서 가계를 이어 가는데 버거움을 스스로 느끼고 계셨기 때문 이었을 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바느질 솜씨는 이웃 부인들의 입과 입을 통해 소문이 나서 찾아오는 이들이 늘어났다. 오염되지 않은 무공해 청정 샘물로 정성스레 길러지는 통통하고 알맞게 자란 콩나물의 인기도 높아졌다. 콩나물시루는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셋으로 늘려야 할 판이었다. 잠자는 시간에도 두세 번씩 일어나 물을 줘야 하는데 콩나물시루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기업의 번창(?)을 뜻하는 힘차고 희망찬 신호음처럼 들리기도 했었다. 약속 날짜를 지키기 위해 자정이 넘도록 바느질을 하다가 잠들어 물을 줘야 할 시간에 깨어나지 못하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아버지가 콩나물시루에 물을 붓고 있는 모습을 본 것도 여러 차례다. 어린 소견으로 나는 이 콩나물 사업(?)이 단순히 식탁의 빈자리를 채우거나 모자라는 학비 일부를 보태는 것으로 그치고 말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 내가 “기업”이나 “비즈니스”라는 단어 자체를 알고 있지도 않았으니 ‘콩나물 장사’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내 생각에 이를 기업화를 해도 훌륭한 비즈니스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나 보다. 오늘의 내가 뛰어난 기업인으로 자라지는 못했을망정 30 여년이 넘게 한길만을 걸어오고 있는 오늘의 내 비즈니스 마인드는 아마도 이때부터 시작 된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당시 우리는 자동차라도 드나들 수 있을 만큼 큰 두 쪽짜리 대문이 있는 법원의 관사에서 살고 있었다. 나는 이 대문을 이용하여 판매 촉진을 위한 홍보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우선 이 기업을 알리는 간판 같은 것이 필요할 것 같았다. 양쪽 대문의 상단 부를 여섯 등분을 하여 왼쪽 문에는 ‘콩나물’, 오른쪽 문짝에는 ‘팝니다.’라는 글자를 먼 거리에서도 눈에 뜨일 수 있을 만큼 큰 글씨로 간판 제작을 착수하게 되었다. 글씨는 흰색 분필로 썼다. 학교에서 돌아와 두세 시간의 각고 끝에 완성시킨 ‘콩나물 팝니다.’라는 글씨는 약 3-40 메타의 거리에서도 읽을 수 있을 만큼 선명하였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밀물처럼 밀려오는 고객들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에 부풀어 있었다. 어머니와 누나가 땔감을 걷어오기 위해 이십 리는 족히 될 내장산까지 나다니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