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 Page 124

장모님과 무씨 집안을 정리를 하다가 ‘무씨’라고 써있는 조그만 종이봉지 하나를 발견했다. 방문하셨을 때 뒷마당에 심어보라며 가져다 주신 것이었다. 잘 보관해 두었다가 시간이 되면 심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어버린 채 지내온 지 삼 년이 지났다. 손길을 잊고 있었다는 데 대한 죄송한 마음이 뭉클 솟아올랐다. 삼 년 전 장모님이 이곳을 무씨를 보자 장모님의 정성 어린 나는 곧 뒷마당으로 나가 씨를 심었다. 일구어 놓은 밭은 족히 대여섯 평은 될 것 같았다. 씨를 심고는 있지만 삼 년이 넘은 이 씨앗에서 과연 싹이 나와 줄지가 걱정이었지만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심었다. 골을 파서 대충 술술 뿌려도 되겠지만 씨앗 한 알 한 알을 일정한 간격으로 심었다. 사위에게 주신 마지막 선물을 한 톨이라도 허술하게 다루고 싶지가 않아서였다. 장모님께서 이 작은 알맹이 하나하나에는 귀한 생명이 담겨 있고 종묘상에 가서 사 가지고 오셔도 될 것을 구태여 손수 가꾸어 거둔 씨앗을 가지고 오신 장모님의 손길을 간직하고 싶기도 했었다.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었더니 며칠 후부터 삐죽삐죽 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반가웠다. 종이봉지에 쌓인 채 삼 년이 넘도록 죽지 않고 이어온 생명력에 대한 찬사를 올리고도 싶었다. 트고 나고부터는 이 텃밭을 기웃거리는 횟수가 훨씬 많아졌다. 헤쳐도 주며 골고루 물을 주니 하루가 다르게 잘도 자랐다. 싹이 잡초도 뽑아 주고 딱딱하게 굳어진 땅을 꼬챙이로 돋아난 떡잎 사이로는 새 잎새가 나오고 ‘무’ 본래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을 하니 무의 잎새 위에 장모님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것 같다. 장모님을 대하는 것처럼 기쁘고 며칠만 지나면 열무김치라도 담게 될 아내는 “어머니가 계셨으면 열무김치도 담아주고 꽁보리밥도 지어 주셨을 텐데” 라며 눈을 아래로 깐다. 장모님이 이곳에 와 계실 때의 일이 생각난다. 아내가 직장에 나가 있는 동안 집안에는 재택(在宅) 근무를 하고 있는 나와 장모님 두 사람뿐이었다. 우리 가족을 위해서인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인지 온종일 부엌에서 이것저것을 만드시느라고 분주하셨다. 뒷마당에 나가 연한 컴프리 잎새를 따다가 나물도 무치고 부추를 뜯어다가 겉절이도 만드셨다. 가끔 혼자서 운수 떼기 화투를 하고 계실 때 “저와 자장면 내기 화투 한판 칠까요?”라며 다가가면 그렇게나 좋아하시더니. 한국방문 시 처가에 가보면 이층 옥상에는 크고 널찍한 적갈색 플라스틱 통 여러 개가 놓여 있었다. 어느 통에는 상추, 다른 통에는 아욱, 그리고 각 통마다 쑥갓이며 고추, 부추도 있고 열무나 풋배추도 심어져 있었다. 또 어느 통에는 채송화를 비롯하여 백일홍이나 과꽃 등의 일년생 화초들도 있었다. 삭막 할 것 같은 시멘트 슬래브 바닥에 파란색의 잎새와 울긋불긋한 꽃으로 조화를 이룬 옥상에는 꿀벌이 날아들고 나비들도 넘나들었다. 점심상에 오른 무공해 채소로 만들어진 맛깔스러운 반찬은 식욕을 돋워 주었다. 장모님께서 비벼주시는 열무김치 비빔밥은 일미중의 일미였다. 꽁보리밥에 열무김치를 넣고 참기름 몇 방울과 약간의 고추장을 곁들여 만들어 주시던 열무비빔밥의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장모님이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나도 이 무에서 씨를 받기 위해 몇 포기는 종자로 쓰려고 남겨 두었다. 물도 열심히 주고 잡초도 뽑아주며 각별한 정성을 쏟았다. 이곳에서도 화원이나 종묘상에 가면 구할 수도 있겠지만 장모님의 마지막 손길이 스며있는 이 무씨의 대를 이어가고 싶었다. 연 보라색 꽃이 피고 열매도 맺혔다. 그런데 뜻밖의 방해꾼이 생겼다. 뒷마당에 나가니 수십 마리의 새떼가 놀라서 날아가는 게 아닌가. 맺혀있던 씨앗을 모조리 갉아먹었다. 빈 껍질만이 앙상했다. 대가 끊겨 안타까워하는 조상님들의 마음이 이랬을까 싶기도 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서 가지 하나 하나를 샅샅이 뒤적여봤다. 다행히도 빈 껍질 속에 하나씩 둘씩 붙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