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 Page 122

면에서 자기 나름대로 생각을 해 오거나 기대하고 있던 어떤 ‘잣대’에 미치지 못하여 실망스러웠던 마음을 토로하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스러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매제가 현역시절 모 부대의 사단장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나에게 비쳐진 그의 모습이 생생하다. 그들을 만나기 위해 사단장 공관을 방문했을 때 우리 가족을 위해 저녁준비를 할 때의 모습이다. 부엌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동생을 도와가며 음식의 준비나 테이블 세팅을 도맡아 하며 바삐 움직이고 있는 투 스타 장군의 모습을 바라다보며 지난날의 내 모습을 되돌아보기도 했었다. 공관에 들어가기 위해 정문에서 위병들로부터 <받들어 총>으로 인사를 받는 그 위엄과 묵직한 품위 같은 것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나의 삼여 년의 병역의무 기간 동안에 장교와 사병간의 격차를 재보기에 앞서 우선 군대의 밥그릇의 숫자로 선임과 후임을 구분하며 제대 말기의 고참 병장이 하늘처럼 우러러 보이며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도 해야 했던 그 시절을 돌아다보기도 했다. 장교와 사병의 차이 정도가 아니고 더더구나 군 생활 중에서 나의 최고 계급이었던 병장과 투 스타 장군과의 차이를 어찌 셈을 통하여 비교라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장군이 날더러 형님이라 부르며 그날의 특별 메뉴를 나에게 가장 가까운 자리로 밀어 놔주려는 행동이며 모자람은 없을까 계속 살펴주는 그는 투 스타 장군의 모습이 아니었다. 형제의 모습일 뿐이었다. 하나의 소탈하고 평범한 가장의 모습이요 허물없이 지낼 수 있는 친구요 녀석이 장군 같지 않다는 고모부의 모습이 이런 모습을 두고 한 말이었을까. 이곳의 많은 이민자들은 지난 날 화려했던 시절의 환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가끔 보게 된다. “내가 한국에 있을 때는......” 운운하며 한때 깃발을 날리며 내달리던 한국에서의 화려했던 추억만을 더듬으며 현지 적응에 힘들어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것 같다. 그러다가 미국생활을 포기하고 귀국을 하는 경우도 많았던 한국 경제가 호황을 누리고 있을 때, 언론에서는 미국에서의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하여 포기를 하고 귀국하는 사람들에 대하여도 고국이 잘살게 되니까 해외동포가 역 이민을 하는 케이스가 늘어난다고 보도를 하는 일도 있었다. 간혹 미국생활을 하면서 성공을 거둔 일부 인사들이 귀국 즉 역 이민을 하여 정계나 재계에서 성공을 거둔 예도 없지는 않다. 미국이라는 곳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다. 맨손으로라도 도전해 보려는 의지나 각오 또는 최소한의 노력이나 뚜렷한 계획이 없이는 이곳에서의 생활에 적응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환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방황을 하다가 포기를 지난날의 추억이나 하고 되돌아가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러한 경우에도 ‘역임인’이라는 그럴싸한 말로 표현하는 경우도 적지가 않았을 것이다. 지난날에 고급장교 출신, 교수 출신, 고위 공직자, 재벌그룹의 임원이나 간부, 또는 중소기업을 경영하던 사람들도 이곳에 와서 지난날의 화려한 경력을 덮어두고 페인팅이나 청소일 같은 막노동 일로부터 시작을 하는 예도 많이 있다. 그들의 피와 땀으로 거두어진 결실로 이곳 한인사회의 위상을 높이고 있는가 하면 1.5 세 2 세들이 미국의 주류 사회에서 자기의 몫을 하게 되는 밑거름의 역할을 하게 된 점을 지나쳐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양 어깨를 빛내던 투 스타 계급장을 가슴속에 묻어둔 채 현실 적응을 위해 때와 시를 가리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서 어떤 교훈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그의 노트북 컴퓨터는 항상 켜져 있고 연구실과 도서실을 드나들며 여러 가지 프로젝트에 골몰하고 있는 모습은 대견스럽기만 하다. 가끔 그들을 방문해 보면 한 사람만으로도 비좁은 공간의 아파트 부엌에서 동생을 돕겠다고 손을 적시고 있는 매제의 모습을 보게 된다. 동생은 남편에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