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 Page 117

울 엄 마 코스모스가 피어있는 들녘을 지나치고 있자니 어머니 생각이 떠오른다. 그때도 코스모스가 만발해 있었다. 그 동네 이름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때에도 그 동네 이름은 모르고 있었다. 충청북도의 어느 소읍에서도 좀 떨어져 있는 농촌 마을이었다. 길가의 논바닥에는 군데군데 볏가리가 쌓여 있었다. 어디 엔가를 가고 있었지만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내 손 에 카메라 하나만 들려 있었던 것으로 보아 아마 과수원 같은 데를 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해마다 한두 번씩은 그런 델 갔었으니까. 그러니 그냥 어머니와의 데이트였다고 해두기로 하자. “어머나. 저 코스모스 좀 봐.” 어머니는 코스모스 밭 속으로 들어가셨다. 환갑을 넘기신 분이 “어머나”라는 표현을 하는 것이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십대 소녀가 꽃 앞에서 감상에 젖어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슨 생각에 젖어있는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꽃잎을 만져보거나 코앞으로 끌어당겨 냄새를 맡기도 하셨다. 나는 순간순간마다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댔다. “미스 리도 코스모스를 좋아하나 보네. 마치 열다섯 살 여학생 같네”라고 말하면 “예쁘잖니?” 라고 답을 하셨다. 나는 장난으로 어머니를 “신득 씨”라거나 “미스 리”라고 부를 때가 많았고 어머니는 이를 재미있어 하시며 나에게 “영보 씨”라거나 “미스터 박”이라는 호칭으로 응해 주셨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집을 나서는 일이 많았었다. 데이트라고는 했지만 휴가 때나 주말에 다니러 와 있는 동안에 어머니가 장날 같은 때 시장에 나가시면 바구니를 뺏어 들고 따라나서는 정도였다. 한 손에는 시장바구니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어머니의 손목을 잡고 따라나서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골 마을에서 나이 스물이 훨씬 넘은 아들과 환갑이 넘은 어머니와의 이런 모양새가 사람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를 생각해 본다. 어머니는 나와의 이런 데이트를 좋아하셨다. 걸으면서 무슨 특별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니었다. 주로 나 혼자서 말 같지도 않은 말들로 쉴 새 없이 이죽거리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를테면 “외할아버지는 여자이름을 왜 이렇게 모양다리 없이 지어놨어? 도대체 신득이가 뭐야, 신득이가. 거기에다 왜 하필이면 매울 신(辛)자야”를 비롯한 나의 말은 계속되었다. 어머니의 이름은 ‘신득(辛得)’, 청주 이(李)씨였다. 어렵게 얻었다고 하여 이런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겠다고 하신다. 신득 씨는 날 사랑해?“ 라든가”살아오면서 나보다 더 좋고 멋있는 남자 본 일 있어?“라는 등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쉴 새도 없이 뇌까리는 걸 그치지 않았다. 이제 대학생이 된 지도 이삼 년이 지난 나이의 아들과 당시 환갑을 훨씬 넘긴 어머니와 길을 함께 걸으면서 하는 대화였다. 다 큰 아들의 이러한 농지거리에”그래요, 사랑해요 영보 씨“라고 받아 주시던 어머니셨다. 나는 원래 이렇게 수다스럽고 말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다. 꼭 해야 할 말도 입 밖에 꺼내지도 못하는 아주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 성격이었다. 어릴 적에는 집안이나 동네 어른, 심지어는 학교의 담임선생님을 만나도 인사 한 번 제대로 한 적이 없어 많은 꾸지람을 듣기도 했었다. 오죽하면 어머니는 나에게 ‘소 죽은 귀신’이라고까지 하셨을까. 학교에서는 선생님께서 내놓으신 문제의 답을 알면서도 손을 들어본 적이 없었고 심지어는 출석을 부를 때 대답을 하지 않아 결석으로 처리되는 경우도 있었다. 친구들과의 대화는 물론 어울려 놀지도 않던 시절이었다. 인사를 하기가 싫었던 것은 아니었다. 친구들이 싫거나 함께 어울리는 것이 싫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수줍음을 타기 때문이었던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무언가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상냥하게 인사도 잘하고 친구들끼리 다소곳이 속닥거리는 것을 보면 ‘살살이’같이 여겨졌고 그런 행동을 보면 요새 말하는 닭살이 돋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내가 어머니에게 이런 구성지지도 않은 농지거리를 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에 가고 난 이후부터였다. 다분히 계획에 의한, 마치 억지로 쓴 각본을 연출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어쩌면 나 자신의 답답한 성격을 스스로 고쳐보겠다는 생각에서였을지도 모르겠고. 아니면 나의 이러한 성격 탓으로 이제까지 부모님의 속을 썩여 드려온 것에 대한 속죄의 뜻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부터라도 작으나마 기쁨이나 즐거움 같은 것을 드려야겠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