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 Page 108

들이닥치고 왼 팔에 붉은 완장을 차고 신도 벗지 않은 채 안방에 들어서는 순박하고 친절하던 이웃의 청장년들의 굳어진 표정들 앞에서는 공포감마저 느껴졌다. 아버지는 이미 핀 중이었고 경찰관이던 큰형은 후퇴를 하게 되어 각자 흩어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고등학생이던 둘째와 셋째 형도 자칫하면 끌려가 부역을 하게 될지도 몰라 각자 흩어져 피해 다니는 처지에 있었다. 할머니 한 분만을 남겨두고 피난길에 나서며 옷소매를 적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니 덩달아 눈물이 나기도 했었다. 어머니는 할머니도 함께 떠날 것을 수 차례 간청 드렸지만 한사코 따라 나서지 않으셨다. “애비나 아이들(형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 집에 아무도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며 “죽어도 나는 여기서 죽을 테니 어서 애들을 데리고 떠나라”며 발길을 떼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역정을 부리시는 것이었다. 우리는 충청남도 보령의 관당리 라는 어촌을 향해 길을 떠나게 되었다. 여덟 살의 철부지였던 나는 이 피난길이 마치 소풍 길을 나서기나 한 것처럼 마음이 들뜨고 있었다. 모처럼 가족들과 함께 나선 즐거운 나들이이기나 한 것처럼. 피난길에 허기를 달래기 위해 가지고 가는 주먹밥을 먹는 일도 즐거웠다. 새벽부터 수 십 리 길을 걸어서 가야 했다. 무더위 속에 다리는 퉁퉁 붓고 발바닥에 물집이 생겨 몹시 아팠고 피곤했다. 유월의 더운 날씨에 됫병에 담아온 샘물은 미지근한 정도를 훨씬 넘어 따뜻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흐르는 도랑물을 손바닥으로 퍼 마시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나보다 세 살 아래의 남동생은 다리가 아프다며 길바닥에 주저앉기를 거듭했다. 초등학교 6 학년과 4 학년이던 두 누이와 여덟 살이었던 나는 번갈아 가며 동생을 업고 걸어야 했다. 그 당시 어머니는 막내 여동생을 임신 중이었고 양손엔 짐 보따리를 들고 등에까지 짐을 지고 있었으므로 동생을 업기까지는 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초등학생인 삼 남매가 다섯 살짜리 남자동생을 교대로 업고 갔지만 많이 걸어야 오십 미터나 백 미터 정도를 가면 지쳐서 교대를 해야 했다. 이럴 때에도 생존을 위해서는 약간의 지혜가 필요했었나 보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이를 극복할 최소한의 방편이 생기게도 되는가 보다. 우리는 집을 떠날 때 얼마의 주먹밥 외에 익기는커녕 채 자라지도 않은 사과 열매 여러 개를 가지고 나섰다. 벌레가 먹어 자라기도 전에 땅에 떨어진 새끼 사과를 주워 온 것인데 동생에게 입막음으로 이 사과를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과를 통째로 주는 것이 아니라 새끼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크기로 저며서 입에 넣어 주는 것이었다. 그 사과 쪼가리가 입에 머물러 있는 동안 자기 스스로 걸어가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녀석은 그 작은 사과 한 점이 입에 들어가자마자 삼키고 나면 또다시 주저앉아 울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러기를 수도 없이 반복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것도 인간의 머리에서만 나올 수 있는 지혜였을까. 아니면 최후의 안간힘 같은 것이었을까. 누나는 “사과를 그렇게 빨리 삼키니까 다리도 그만큼 빨리 아파지지. 조금 천천히 먹어봐. 그러면 훨씬 더 많이 걸을 수 있을 테니까”라고 말을 했다. 녀석은 이제 입에 넣어주어도 즉시 삼키지 않았다. 씹지도 않았다. 입 속에 놓고 혀로 굴리며 얼마의 시간이 흘러 사과가 저절로 녹아날 때에야 침을 삼키듯 넘기는 것이었다. 녀석도 가능한 한 멀리까지 걷기 위한 나름대로의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었을까. 사과 쪼가리가 그의 입에 남아있을 때까지는 아무런 투정도 하지 않고 스스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입에 넣어주자마자 금방 삼키고 나서 걸음을 멈추고 주저앉아 울던 아이. 그러나 이제는 “사과 다 없어졌다”며 씨익 웃는 것이었다. “그것 봐, 다리가 덜 아프지? 그리고 더 많이 걸을 수도” 있지? 라면 “응, 나 이번엔 백 발짝을 걸었어.” 라며 으쓱해 하는 모습을 보이던 그 아이, 지금은 육 십대 후반의 나이가 되어있고 그의 이마 넓이는 내 이마보다 훨씬 넓어져 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다. 오십 년이 넘고, 반세기가 지났다며 말 잔치들이 요란하다. 그러나 그들의 말속엔 무엇이 들어있을까.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라도 실제로 겪었던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들이 들어있을까. 한 모금의 물, 한 톨의 쌀, 그리고 흘린 피와 땀, 그 안에 들어있을 어떤 ‘소중함’ 같은 것을 그들은 알고나 있을까. 그 작은 소중함, 얻을 때에는 기쁨을 가져다 주기도 하고 잃게 될 때는 슬픔을 안겨주기도 한다. 행복도 괴로움도 가져다 주기도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을 해 보게 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