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 Page 107

쌀 한 내끼 해마다 이맘때면 항상 떠오른다. 당시 법원의 판사로서 반동분자 1 호로 지목되어 피신 중이던 아버지가 감시의 눈을 피해 잠시 집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할머니는 아들을 위해 감추어 두었던 한줌의 쌀을 꺼내었다. 한 끼의 밥을 지어주기 위해 장롱 속에 감추어 두고 보석처럼 아껴오던 것이다. 이 한 끼의 식사가 끝나면 또다시 피신의 길을 떠나야 하는 아들에게 따뜻한 쌀밥 한 술을 먹여 보내겠다는 어머니의 정성이었을 게다. 쌀로 밥을 지었다고는 하지만 꽁보리 위에 한줌의 쌀이 뿌려져 있는 정도라고 해야 옳을 것 같았다. 쌀이 섞여있는 부분은 아버지의 밥그릇에 담겨졌다. 다른 식구들의 밥은 완전 꽁보리밥이었다는 것을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게 된다. 무거운 침묵 속에 식사는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피신해 다니면서 겪었던 고초라든가 어디를 어떻게 다녔는지 등에 대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았다. 그 동안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왔으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하여 묻지도 않았다. 밥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가족들 중에서도 어느 누구도 입 한번 여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놋쇠로 된 수저와 젓가락이 오가고 있을 뿐이었고 가끔 젓가락이나 수저가 사기그릇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이제까지의 생사에 대한 궁금증이나 만남에 대한 반가움 같은 것을 표현할만한 겨를도 없었던가 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지내온 일들에 대하여 들려주거나 들을 만큼의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 따발총을 들이대고 인민군이 불쑥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기도 했다. 동란이 시작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가깝게 지내오던 이웃사촌들이 밀고라도 하는 날에는 상황이 끝나고 만다. 이러한 침묵 속에서의 대화는 마음속에서나 오고 갈 수밖에 없었을 게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다섯 살짜리 동생아이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나 쌀 한 내끼만~”. (쌀 한 내끼: ‘쌀 한 톨’의 충청도 서해안 지방의 사투리) 그 순간 모두의 동작이 멈추어졌다. 눈동자들은 움직이지도 않았고 시선은 목표물도 없는 허공이나 바닥 쪽에 고정시켜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슬그머니 수저를 내려놓고 일어서 밖으로 나가셨다. 내가 초등학교 이 학년에 올라간 지 두어 달째에 들어설 때였다. 담임선생님께서 “여러분, 오늘은 수업이 없으니 모두 집으로 일찍 돌아가세요. 학교에서 연락이 갈 때까지 집에서 기다리세요. 그때 가지 모두 건강하셔야 돼요”라고 말씀하셨다. 무슨 영문인지도 몰랐다. 선생님께서는 다른 아무런 설명도 없으셨다. “벌써 방학인가요?”라고 묻는 아이도 있었고 어떤 아이는 “가정실습인가요?”라고 묻기도 했었다. 가정실습이란 그 당시 집안의 농사일을 돕기 위해 임시 휴교를 하는 것이었다. 대개 모내기 철이나 추수를 하는 농번기 때 삼사일, 길게는 사 오일 동안 휴교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월도 막바지에 들어서 있었고 모내기가 끝난 지도 한참이 된 이때 휴교라니. 이젠 볏 모가 뿌리를 잡아 하루가 다르게 짙은 초록색을 띄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때였다. 어쨌든 나는 학교에 가지 않고 놀게 되었다는 사실이 신이 나서 달음질치듯 집에 돌아오니 집안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짐 보따리를 싸기도 하고 헛간에 재봉틀이며 라디오, 유성기같이 값이 나갈만한 물건을 깊숙이 집어넣고 보릿짚이나 땔감으로 쓰는 마른 소나무 가지로 덮어두기도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당시 미국에 있는 삼촌(첫 하와이 이민가족의 자손)이 어머니에게 선물로 사준 재봉틀이 우리 집에서는 첫 번째로 꼽히는 재산목록 제 일호라 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가져본 일이라고는 단 한 번도 없었던 라디오나 유성기가 우리 집 헛간에 감추어지고 있다는 것이 의아스러웠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와 가까이 지내던 그 지역의 경찰서장이 피난을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