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 Page 105

불 효 고국을 떠난 지 만 팔 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경이적으로 변화된 서울의 모습에 대한 감상 같은 것은 뒤로 미루기로 하고 오랜만의 만남에 대한 흥분을 가라앉힐 연습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그 동안에 부모님의 패인 주름살이 훨씬 깊어졌고 많아진 모습을 보니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민 보따리를 자동차의 트렁크에 옮겨 실을 때 살아생전 또다시 만날 수가 없기나 한 것처럼 옷깃을 붙잡고 소리 내어 우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떠날 당시 코흘리개 초등학생이던 조카 녀석들의 키가 농구선수처럼 크게 자라 있었고 목소리마저 굵고 우람차진 모습들이었다. 형님들이나 누님들의 희끗거리는 머리 색깔을 바라다보니 세월의 흐름이 얼마나 빨랐는지를 실감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당시 우리 세 식구에게 허용된 환전 총액 이천 몇 백 달러에 우리 식구의 생존을 걸어야만 했던 일이 뇌리를 스친다. 서울에서 테네시까지의 항공료를 포함하여 중간 기착지에서의 숙식비, 앞으로 살아가야 할 아파트 계약금, 얼마간의 식료품, 최소한의 세간 사리를 마련하다 보니 남아있는 액수는 오백 달러도 채 되지 않았었다. 직장도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시작된 이민생활, 팔 년여 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는 이유만으로 한 통의 전화나 편지 한 장 보내지 못했던 죄책감을 속으로 새기는데도 얼마의 노력이 필요했었다. 서울에 도착한 후 며칠이 지나고 나니 형님들이며 누님들 그리고 동생들의 방문도 뜸해졌다. 아침에 아버님이 출근하고 나면 집에는 어머님과 나, 둘만이 남아있게 된다. 집에 있는 동안 어머님은 내가 미국 생활을 해오면서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묻기도 하셨다. 우리가 미국 생활을 해 오면서 많은 고생을 했을 것이라며 부모로서 아무 것도 도와 준 것도 없었다며 마음이 아프다는 말씀을 하셨다. 하루는 점심식사를 하면서 “내가 너에게 얼마의 돈을 좀 주고 싶은데 미국에 돌아갈 때 미국 돈으로 바꾸어 갈 수 있지?” 라고 물으시는 것이었다. 나는 “돈은 무슨 돈……. 엄마가 무슨 돈이 있다고”라고 말하자 “다른 애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작으나마 얼마씩이라도 도와준 일이 있었지만 너한테는 이제까지 땡전 한 푼도 도와준 일이 없어서 항상 마음에 걸렸었다.”며 “언제 네가 오면 주려고 푼푼이 모아둔 것이 좀 있다”며 이번에 꼭 가지고 가라는 말씀이셨다. 나는 “이제 우리 부부 둘이 다 일을 하고 있어 생활에 아무런 어려움도 없으니 걱정하시지 않아도 된다.”며 사양을 했다. 그러나 “그래도 이번에는 꼭 주고 싶으니 가져가라”고 하시며 물러서려 하지 않으시는 것이었다. “도대체 얼마를 주시려 구요?” 라고 묻자 “많지는 않지만 6-70 만 원 정도를 줄 수가 있다”고 하신다. “엄마 그 돈 엄마가 꼭 쓰셔야 할 것도 안 쓰시고 잡수시고 싶은 것도 안 잡수시며 모은 돈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제가 그 돈을 받은 것으로 생각을 하겠으니 그 돈 제발 다른 사람 아닌 엄마와 아버지 자신들만을 위해서 쓰세요.”하자 “돈이 너무 작아서 그러니?” 라고 하신다. “아녜요, 그 돈이 왜 작은 돈이에요?” 이런 식으로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면서 끝내 사양을 하고 받지 않은 채 돌아오게 되었다. 당시의 환율로 친다면 약 6-700 여 달러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던 것 같다. 최저임금으로 시간당 이 달러 오십 센트를 받고 있었던 나에게는 이 금액이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액수를 돈으로서의 가치여부를 계산 해 보기에 앞서 이 60 만원이라는 돈이 어머님에게는 600 만원, 6000 만원 또는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당시 이 700 여 달러를 단순히 돈으로서의 가치로만 생각한다 해도 내게는 결코 작은 돈은 아니었다. 풀 타임(Full Time)으로 일을 하면서 세금 등을 공제한 나의 두 달 치 월급에 해당되는 액수다. 절약과 절제를 하며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이삼 개월의 생활비가 될 수도 있는 금액이었다. 딴엔 어머님에 대한 나름대로의 배려였다고 생각했었다. 효도라고까지 야 말할 수 없었겠지만 이제까지 끼쳐드린 불효에 대하여 작으나마 갚음을 대신하겠다는 생각에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얼마의 돈을 사양한 것이 아니라 말로서는 표현 할 수조차 없는 어머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거부했던 것이다. 어머님이 부모로서 자식에게 베풀고 싶은 간절한 마음, 주려는 기쁨, 정이 듬뿍 담긴 사랑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