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 Page 104

채의 집은커녕 그 대식구가 살 수 있는 전셋집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것이 아버지의 오십 년 공직생활의 결산이었다. 이런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출까지 했던 누님 생각이 떠오른다. 누나는 음악을 무척 좋아해 성악가가 되는 것이 꿈이기도 했었다. 그 당시 환경이나 여건상 음악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은 시골의 면 소재지의 가정에서도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지만 당시에는 피아노 한 대도 없는 학교도 많았다. 누나가 음악공부를 한다는 것은 중고등학교의 교과과정에 있는 음악시간에 출석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당시 한국가곡 100 곡 집에 실리기도 했던 <아리랑 가을>의 작곡자이며 원주여고의 음악교사로 있던 백기품 선생을 만나게 된 것도 누나가 음악에 대한 꿈을 키우는데 한 몫을 하게 되었다. 학과시간 전과 후에 피아노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해주신 분이다. 어려서부터 연습과 레슨을 받아오지 않고 음악대학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은 것은 그때나 지금도 마찬가지일 게다. 지방에서 음악공부를 한다는 것은 일주일에 한번 있는 음악수업 시간이 전부였다. 그 당시 지방에 개인 지 도를 받을만한 시설은커녕 가르칠만한 교사도 없었다. 설령 그런 게 있었다 한들 우리 집 형편에 그런 델 이용할 여건이 되지도 않았겠지만. 그러니 음악에 대한 이론과 실기는 거의 독학을 하는 셈이었다. 누나는 새벽 다섯 시에 집을 나가면 늦은 저녁에나 귀가를 하게 되었다. 정규 수업이 시작되기 전과 방과 후에나 피아노 연습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허약한 체질에 호흡곤란을 겪어가며 새벽 눈길에 넘어져 혀가 잘리기도 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합격. 원주여고 개교 이래 서울대 합격은 처음이었다고 했다. 축하의 인사도 많았다. 국립대학이라서 등록금도 일반 사립대학에 비해 훨씬 낮았다. 그러나 등록마감일은 다가오는데도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보다 못한 법원의 직원들이 모금을 해주기도 했지만 이것마저도 거부한 아버지였다. 이것도 청렴결백이라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자존심이라는 것 때문이었을까. 아까 그분의 말처럼 가난하게 살고 있는 무능한 병신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등록마감일이 지나고 난 며칠 후 누나는 집을 나갔다. 가출을 한 것이었다. 얼마 후 고종사촌 누나가 당시 김일엽 스님이 주지로 있는 충남 예산의 수덕사에 머물고 있는 누나를 달래어 데리고 돌아온 일도 있었다. 스님이 되겠다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 후 모 중학교에서 영어와 음악 강사 일을 시작했었다. 강원도 간현 이라는 곳에 신설된 사립학교였다. 고등학교 출신으로 중학교에서 강의를 한다는 것이 이례적이기도 했었지만 제법 오랫동안 계속해왔다. 그러던 중 서울의 H 대학에 음악대학이 설립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사 년 후의 일이었다. 특차로 장학생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응시를 했었는데 준비도 없이 덤빈 시험이었지만 합격이었다. 4~5 년 정도 나이차이의 동급생들로부터 언니나 누나로 불렸는데 그때의 입시광고를 보지 못했다면 누나의 인생에 대학이라는 것과의 인연은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이런 분이었다. 그때 나에게도 요즈음 아이들처럼 약간의 대담성이라는 것이 있었다면 몇 번씩이나 가출이라는 것을 시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에게는 그런 용기나 대담성도 없이 혼자서 속을 끓이며 앓고 있던 소인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나 보다는 생각을 하면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쥐뿔도 없는 주제에 그것도 자존심이라는 걸까 라며 이런 아버지를 경멸을 하기까지 했던 나 자신을 뉘우치게 된 것은 세상을 떠나시고도 한참 후가 되어서이다. 사건이 터졌다 하면 액수로 몇 백억, 몇 천억이고 사과나 라면박스에 포장된 현찰이 지프차나 트럭이 운반수단으로 동원되고 있는 현실 앞에 다가서고 나서야 알 게 된 것이다. 아버지의 대쪽 같던 옹고집이 오히려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워 지며 이로 인한 가난이 차라리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책망을 듣고 각성을 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도 이제야 깨우치게 되었으니 부모님으로부터 이 죄를 어떻게 용서 받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난으로 시작되었고 가난 속에서 살아왔으며 가난하게 오십 여 년의 법관인생을 마감하신 아버지를 존경하며 감사 드린다. 그런 분을 닮지 못한 나 자신을 되돌아보면 부끄럽고 죄송스럽기가 한이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