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박영보 수필 1집] | Page 100

직접 매점에 가서 돈을 지불하고 사왔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호텔 내의 매점도 호텔에서 직영되고 있는 별도의 부서 정도로 생각 했었다. 한 통을 가지고 오면 돈을 주겠다고 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손님으로부터의 이러한 부탁은 호텔이나 호텔 종업원이 책임져야 할 일이 아니었다. 즉 자기들 업무의 소관이 아니고 단지 손님의 부탁을 개인적으로 도와준 일일 뿐이었다. 잠시 후 벨 보이가 우유를 가지고 왔었는데 25 센트라는 것이다. 미국을 여러 차례 왕래를 했거나 이민자들로부터 ‘미국에서는 모든 봉사에 대하여 통상 10% 정도의 팁을 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런 사전 지식(?)을 쌓아온 나는 25 센트의 10%는 2.5 센트인데 미국에는 0.5 센트짜리의 화폐 단위는 있지도 않아 약간 올려 3 센트의 후한(?) 봉사료라면 선심까지 포함된 팁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말과 함께 1 센트짜리 세 개를 건넸다. 그는 이 팁을 한사코 사양하는 것이었다. 속으로 “이 사람들도 우리처럼 사양을 하는 미덕이 있는가 보다”라고 생각하며 계속하여 받으라고 하니 결국 하는 수 없다는 듯 “땡 큐”라며 받아 가는 것이었다. 나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미국 생활을 제법 세련되게 시작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다. 약간의 우쭐함과 하루아침에 나도 나에게 봉사를 해준 사람들에게 팁을 주며 사는 멋진 인생이 시작되었다는 생각. 그 흐뭇함을 속으로 새겨야 하는 흥분을 가라앉히는 데에도 한참은 걸렸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터무니없는 흐뭇함이 가라앉고 그럴싸한 미국 생활의 시작에 대한 으쓱함이 여지없이 뭉개지게 된 것은 이런 일이 있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까지도 민망스럽고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다. 나는 보통 직장에서의 점심으로 샌드위치 백을 가지고 다니며 동료들과 라운지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대부분 이었다. 그곳 주민들의 집에 초대되어 식사를 하거나 그들이 우리 집에 오면 함께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는 일이 많았다. 식당 같은 데를 자주 가는 편이 아니어서 여기서 팁 같은 것에는 별로 신경을 쓸 일이 없었다. 어쩌다가 그들과 커피숍에 가서 당시의 커피 값이 20 센트짜리 한잔을 마셔도 팁으로 최소 25 센트 자리 동전 하나씩을 놓고 나오는 것을 여러 차례 봐오기도 했었다. 나중에 Dale Owen 이라는 친구와 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엉겁결에 하와이에서의 3 센트짜리 팁 이야기를 발설할 뻔했던 일이 떠오르면 지금도 아찔하다. 미국인들에겐 이 사실은 아직까지 비밀에 붙이고 있다. 하와이 호텔의 그 종업원이 나로부터 3 센트의 팁을 받아 들고 호텔 방문을 나오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혹시 이들의 입에 붙어 다니듯 하는 “F”자로 시작되는 욕을 하며 3 센트를 패대기 치지는 않았을까 도 생각해 본다. 그 친구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지금까지도 가셔지지 않는다. 계산된 물질적인 팁이 아니고 베풀어 준데 대한 마음의 팁을 전했어야 했었는데. 그때 호놀룰루를 이륙하여 예정보다 하루 후인 내쉬빌 공항에 도착 하니 우리를 픽업하러 공항에 나오기로 했던 친구는 나오지도 않았다. 연락을 해주기로 했던 K 항공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전화번호도 없어 연락을 할 수가 없어 주소만 가지고 찾아가야 하는데 그들이 살고 있는 컬럼비아까지 가자면 내쉬빌 공항에서 약 7-80 마일의 거리란다. 주소만 가지고 택시를 타고 그 집까지 가는 택시비는 그 당시의 화폐 가치로는 거금에 해당되는 50 불을 내라는 것이다. 나는 “친구의 말로는 공항에서 자기 집까지는 20 불이면 된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이는 가격 절충을 위한 나의 거짓말이었다. 택시 기사는 CB 라디오로 사무실과 몇 마디 말을 나누더니 25 불에 해주기로 하여 목적지에 도착했다. 변경된 도착일정을 알려주겠다던 K 항공으로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은 바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K 항공의 직원은 우리에게 거짓말로 우리를 또 한 번의 고통을 준 것이었다. 우리는 한국의 국적기인 K 항공의 비행기를 타고 와서 진짜 서비스는 노스웨스트로부터 받은 셈이다. 내가 그 당시 조금만 더 세련된 삶을 사는 방법을 알고 있었더라면 노스웨스트의 그 부인의 이름과 연락처를 받아 둘 생각을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후에 감사의 카드라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그때 노스웨스트의 그 여승무원, 얼굴 모습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지만 물질이 아닌 마음의 빚을 갚고 싶다. 감사의 마음에 사랑과 정성이 함께 담긴 진실 된 팁을 전하고 싶은 지금의 내 마음이기도 하다. 그때 그 부인의 모습.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생기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