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샘터 Soonsam 2018 Winter | Page 43

였다고 하니, 만일 이만기 선수와 같은 궤도를 타셨다면 우리 미국에 들어오신 후 가끔 나가셔서 아내를 만나고 다시 미국 는 조영균 집사님을 영원히 못 보았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 에 들어오시곤 했었는데 한국에 혼자 있는 아내의 임신 소식 을 잠깐 했습니다. 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출산 소식을 듣고도 결혼 반대로 10월달이 되어서야 한국에 나가 아기를 처음 볼 수 있 청년 시절 3남2녀중 한국에 살았던 형제들은 안타깝게도 다 일찍 돌아 가시고 큰 누님(71세)과16살 아래인 막내인 본인만 건재하시 답니다. 대학 졸업후 2년동안 씨름팀에 몸담고 있었는데 먼 저 미국에 와 계시던 큰 누님과 엄마가 미국으로 초청해주셨 습니다. 미국에 와서 Wake Tech을 다니는 도중 매형이 대학원을 가 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하셔서 뉴욕에 있는 대학원을 가려 고 뉴욕에 갔다가 정작 대학원은 안 가고 야채가게를 시작하 셨답니다. 2년 동안 5만불을 벌었을 정도로 사업수완이 좋으 셨다고 하네요. 한 3년 정도 야채 가게를 하다가 식당을 해보 으셨다네요. 아기를 보고 11월에 다시 미국에 들어왔는데 아 기 정호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 거리고 보고 싶어서 미국의 삶 을 정리하고 한국에 다시 나가서 1995년 3월 7일 정호 돌잔 치를 한 후 4월 1일에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셨다고 해요. 그리고 다시 마산으로 내려가셔서 대형 포장마차를 시작하셨 는데 그 사업도 아주 잘 되었답니다. 98년 5월까지 사업을 하 면서 둘째 정수도 태어났는데요, 그때가 IMF가 터지고 얼마 안 된 때라 아내와 아이들 초청이 거절돼서 혼자 미국에 들어 왔고 마침내 1999년 3월달에 아내하고 아이들을 다 미국에서 만나실 수 있었답니다. 려고 보스톤에 친구랑 같이 올라갔는데 식당은 안 하시고 철 신앙생활 판 요리집에서 Chef로 일하게 되셨대요. 얘기만 들어도 집사 Cary에 교회가 있었을 때부터 한결같이 랄리제일한인침례교 님의 청년시절 모습이 어떠했는지 머리 속에 그려졌습니다. 회 멤버이시라는데요, 아내는 늘 교회봉사는 해도 다른 봉사 그러던 중 1994년 3월 7일에 한국에 있는 아내로부터 첫 아 는 그만 하라고 할 정도로 교회를 사랑하신답니다. 하나님과 들 정호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씨름 선수팀에 있 나와의 관계는 1대 1의 관계이기 때문에 믿음에 대해서 평가 을 때 친구 소개로 아내를 처음 만났는데, 본격적으로 만나기 할 수 없다 말씀하시면서 아이들에게도 이런 저런 얘기를 하 시작한 건 2년간의 팀 생활을 그만 두고 미국 들어오기 전에 기 보다 “기도하고 있느냐” 만 물어보신답니다. “네, 기도해 감별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서울에서 감별학원을 다니게 되 요” 라고 답하면 “그러면 됐다”라고 하신 다네요. 첫째 아들 면서 자주 만나게 되셨답니다. 경상도 남자에게는 서울말 쓰 정호가 선교를 간다 했을 때 처음에는 반대했었습니다. 선교 는 서울 여자와 결혼하고 싶은 꿈이 있다는데요, 그러나 집안 지에 가서 혹시 안 좋은 모습들을 보고 시험이 들 수도 있다는 의 반대가 심해 공개적으로 결혼식은 못 올리고 친구들과 같 마음에 반대했었지만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순종하고 가야 된 이 남한산성에 올라가서 간단하게 결혼식을 올리셨답니다. 다고 생각하셨답니다. 집사님의 하루는 주기도문으로 시작하고 힘든 일, 알리고 싶 지 않은 일들 모두 하나님한테만 얘기하신답니다. 힘들다 힘 들다 하면서 자꾸 요구하기보다는 만족하면서 사는 것이 집 사님의 일상이 되셨다네요. 같이 놀던 교회 친구들이 변하는 것을 보고 “뭐가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성경을 읽기 시 작했고, 지금은 예전보다 많이 유순해지셨답니다. 어린시절 안하무인 캐릭터는 이제 없어지신 거죠(웃음). 아이들하고 함 께 놀고 얘기하는 것도 좋아하는데 종종 아이들한테 “아빠 철 좀 들어라” 라는 소리도 들으신답니다. www.fkbc.org 랄리제일한인침례교회 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