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샘터 Soonsam 2018 Summer | Page 35

에 물을 담아서 유리잔에 따라주면 얼마나 좋겠느냐 ? 그러 나 비록 녹슬고 찌그러진 깡통이라도 그 속에 물을 담아준다 면 그는 그 물을 마시고 살 것이다 . 그에게 필요한 것은 물잔 이 아니라 물이다 .” 이 말을 들은 펜윅은 비록 자신은 화려한 유리 주전자가 아니라 , 찌그러진 낡은 양철통이라도 복음을 담아줄 수 있다면 , 기꺼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 그는 즉시로 모든 것을 정리하고 넉 달의 항해 끝에 1889년 12월 , 26세의 나이로 조선에 도착합니다 .
조선에서의 첫 사역
서울에 도착한 펜윅은 처음 열 달 동안 각종 교과서와 지침 서를 참고로 한국어를 배우기에 힘씁니다 . 그러나 암기하는 방식의 한계를 느낀 펜윅은 한국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기로 결심을 하고 , 황해도 소래로 향하게 됩니다 . 그곳에서 펜윅 은 어학을 공부하고 문화도 익히며 , 그의 첫 사역을 시작합 니다 . 특별히 , 소년들을 모아 성경 공부반을 만들어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 펜윅은 성경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한국어로 찬송을 부르기 원했고 , 또한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 1890년 그가 번역해서 가르쳤던 찬송가 중에 하나가 , 우리나라 최초 의 찬송가 이자 ,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 ‘ 찬송가 563장 , 예수 사랑하심을 ’ 입니다 . 그가 당시 번역해서 불렀던 후렴 은 지금의 번역과 약간의 차이가 있었는데 , 다음과 같이 불 렀다고 합니다 . “ 예수씨 날 사랑하오 , 예수씨 날 사랑하오 , 성경으로 내가 아오 .” www . fkbc . org
신학과 선교 훈련
복음에 대한 열정과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뛰어든 선교 , 조 선에서의 사역임에도 불구하고 , 시간이 지날수록 펜윅은 자 신의 부족함과 보다 장기적이고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 신 학과 선교 훈련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 그는 1893년 다 시 귀국하여 , 나이아가라 사경회 때 자신에게 큰 감명을 주 었던 고든 목사를 찾아가게 됩니다 . 고든은 자신의 교회 내 에 1889년 10월에 설립한 보스턴 선교사 훈련학교 ( Boston Missionary Training Institute ) 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 이 학교는 현재 유명한 복음주의 학교인 고든 콘웰 신학교 로 발전합니다 ). 펜윅은 보스턴 선교사 훈련학교에서 공부한 후 , 1894년 4월에 에드워드 폴링 선교사 ( Edward Clayton Pauling , 1864-1960 , 강경침례교회 개척 ) 를 비롯해 다른 5 명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게 됩니다 .
펜윅은 고든 목사와 동료 학생들에게 한국 선교의 필요성 을 적극 개진하였고 , 이에 감동한 고든은 선교사 훈련학교 를 졸업한 학생들을 한국으로 파송하기로 결정합니다 . 이에 고든은 1885년에 세워진 엘라 씽 기념선교회 ( Ella Thing Memorial Mission ) 를 통해 선교사들을 한국으로 파송하게 됩니다 .
개척자 정신과 토착화 선교
이후 펜윅은 폴링과 함께 다시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고 , 그
가 전에 사역했던 소래 교회를 방문합니다 . 그 사이 소래 교 회는 300여명 이상의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고 , 개신교 선교 부도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 소 래교회 성도들은 이제 목사가 되어서 돌아온 펜윅에게 자신 들의 목사가 되어 교회를 맡아 줄 것을 요청했지만 펜윅의 입 장은 확고했습니다 . 그는 안정 된 자리를 거부하 고 , 교회가 없는 곳에 , 아직 복음이 전파 되지 못한 지역에 선교하기를 원했습니다 . 이는 남의 터에서 는 씨를 뿌리지 않겠다는 그의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