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샘터 2017 Spring | Page 35

를 하려면 먼저 성경 공부부터 하라고 하셨어요 . 결국 , 일주 일에 한 번씩 목사님을 만나 면담을 하고 , 성경 공부도 하고 , 4 ~ 5주 정도 교육을 받은 후에야 혼인예배를 드리고 정식으 로 부부가 될 수 있었습니다 .”
그 뒤에도 꾸준히 교회에 나오고 성경 공부도 했지만 , 그때 까지 구원의 확신은 들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 박 집사님은 “ 제가 고집이 세고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편이었다 ” 면서 “ 교리 문답 마지막 질문이 ‘ 구원의 확신이 있 냐 ’ 는 거였는데 ‘ 솔직히 아직 모르겠다 ’ 고 답했다 ” 고 하십니다 .
◎ 외삼촌의 사망 … 주님과의 만남
결혼 후 몇 달이 지난 그해 늦은 봄 , 박 집사님께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 다 . 어릴 때부터 각별한 사이였던 한국 의 외삼촌이 별세하셨다는 소식이었습 니다 . 당시 박 집사님은 성경 요한계시 록을 읽고 계셨는데 , 그중 부활에 관한 구절이 유난히 가슴에 와 닿았을 무렵 입니다 .
수화기 너머로 어머니가 ‘( 네 외삼촌이 ) 눈도 못 감고 죽었 다 ’ 고 하는 말씀을 들으니 갑자기 ‘ 예수님을 믿지 않고 돌아 가신 외삼촌은 어떻게 되셨을까 ’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누리며 잘 사는 분이었는데 , 편하게 돌 아가시지 못하셨구나 ’ 라는 안타까움에 펑펑 울고 말았습니 다 .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박 집사님은 하나님을 만나시게 됐습니다 . 당시 잠자기 전 박 자매님과 하루 일과를 나누고 기도를 하셨는데 , 그날은 걷잡을 수 없이 뜨거운 눈물이 쏟 아져 내렸다고 합니다 . 그리고 그날로 하나님께 신앙을 고 백하셨죠 .
다혜 , 94년 12월에는 딸 다슬 3남매가 태어났습니다 . 세 자 녀는 교회에서 다른 가족의 아이들과 함께 자라났습니다 .
초창기 교회는 그야말로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고 하네요 . 워 낙 교인 수도 적다 보니 누구나 당연히 교회 일을 함께 도우 셨다고 합니다 . 일손이 필요할 때마다 여러 가지 일을 했는 데 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이 글이 실리는 ‘ 순례자의 샘터 ’ 제 작을 도우셨을 때입니다 .
당시 컴퓨터가 보급되지 않았을 때라 당연히 손글씨로 쓴 원고를 받아서 직 접 타자를 했는데요 . 그런데 컴퓨터는 목사님 방에 있는 한 대뿐이었고 , 교회 업무가 끝나는 밤까지 기다렸다가 그 컴퓨터를 이용해 밤샘 작업을 하셨답니 다 . 깜깜한 밤 홀로 남아 원고를 치고 , 편집해서 출력까지 하는 작업이 얼마나 고됐을지 상상이 됩니다 . “ 저는 그저 뒤에서 도울 뿐이었지만 초 창기에는 많은 분이 고생하셨어요 . 공 항 픽업이 수시로 있었고 , 주말엔 반드 시 누군가가 이사를 해서 늘 다 함께 이 삿짐을 나르곤 했죠 .”
캐리에서 랄리로 교회를 옮기며 본당 건물을 지을 때는 온 교인이 공사를 도우셨다는데요 . 힘든 일이었지만 완공되고 보니 ‘ 우리 손으로 직접 지었다 ’ 는 사실이 그렇게 뿌듯하고 기쁠 수 없었다고 합니다 .
중간에 일 때문에 잠시 교회를 떠난 적은 있지만 벌써 25년 넘게 우리 교회 초창기 멤버로 왕성히 활동 중인 박 집사님 . 현재는 가버나움 2목장의 목자로 , 그리고 1부 예배 방송 봉 사자로 사역하고 계십니다 .
◎ 부인 · 세자녀와 함께 성장해 온 교회
결혼 후 이듬해인 92 년 1 월에 아들 종화 , 93 년 8 월에는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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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크게 성장한 것이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모두 가 교회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초창기와는 약 간 다른 분위기에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하십니다 . 교회 여러 사역에 많은 일꾼이 필요하지만 일하는 사람은 다소 정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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